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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프로필 화가 별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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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 프로필 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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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는 대한민국의 추상미술화가로 단색화로 유명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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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1년 경상북도 예천에서 4남 2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박재홍이다.
유년시절 경기도 안성으로 이사를했고, 부친이 대서소 일을 해서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컸던 박서보는 1950년 홍익대학 문학부 미술과에 동양화 전공 2기로 입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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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바로 6.25 한국전쟁이 발발했고, 전쟁 중에 부친이 갑작스레 병사했으며, 박서보는 국민방위군으로 소집되어 남으로 내려가야 했다. 박서보가 부산으로 내려간 홍익대학 전시학교에 찾아갔을 때는 동양화 교수들이 전쟁 중에 학교로 돌아오지 않았다.

당시 서울대를 나와 홍익대학으로 온 김환기( 1913-1974) 교수와 이종우(1899~1981) 교수가 서양화 교수로 있어 박서보는 전공을 바꿔 1952년 다시 2학년으로 등록했다. 1953년 휴전이 되고 환도 후 홍익대학 미술과는 서울 종로의 화신백화점과 YMCA 사이에 있던 장안빌딩 뒤 창고 건물로 옮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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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4년 마지막 학기에는 학교 동기들과 함께 광주 육군보병학교에 입대해 장교 훈련을 받고 군대 문제를 해결했지만, 모집 당시의 약속을 번복하고 육군이 졸업식장에서 수료생들을 현역으로 바로 끌고가자 동기 이원용(1930~, 예명 수헌)과 함께 본인들의 졸업식에 불참하고, 친구 맹인재( 1930~)가 둘을 위해 지어준 호 수헌과 서보를 하나씩 나눠 가진 뒤 1955년부터 본명을 버리고 둘 다 새 이름으로 생활했다. 1961년 박서보와 같은 처지의 보병학교 수료생들이 정부를 상대로 집단 소송을 걸어 전원 제대 통지를 받게 된 뒤에나 도망자의 삶이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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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는 1950년대 국전 등 기존 화단의 가치와 형식을 부정하며 ‘앵포르멜(비정형) 추상주의’를 이끌었다. 특히 무수히 많은 선을 긋는 ‘묘법’(escrite) 연작으로 한국 현대 추상 미술의 존재감을 세계 미술계에 뚜렷이 새겼다.1970년대 초부터 ‘묘법’이라 불리는 무채색 단색화 작업을 해왔다. “스님이 온종일 목탁을 두드려서 참선의 경지에 들어가듯” 연필로 끊임없이 선을 긋는 반복을 통해 정신을 수양하고 탐구하는 작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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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서보는 1956년 홍대에서 만난 이봉상 선생의 이름을 빌려 이봉상회화연구소란 이름의 화실을 운영했고, 이곳은 1957년부터 1960년까지 그가 그룹전을 함께 한 현대미술가협회(속칭 현대전) 동료들의 아지트로 활용되기도 했다.또한 이곳에서 그는 평생의 반려자인 현재의 아내를 만나 1958년 12월에 결혼했고, 슬하에 2남 1녀를 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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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부터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강사로 시작해 1986~1990년에는 홍익대 미대 학장을 지냈다. 1997년 정년 퇴직을 할 때까지 박서보는 회화과 교수로 재직했다. 1970년대에는 한국미술가협회의 부이사장 및 이사장을 역임하며 현대미술 운동도 적극적으로 펼쳤다.

1980년대에는 안성군 공도면에 작업실을 짓고 작업에만 매진 했으며 1997년 마포구 성산동에 새로 지은 작업실에 1994년에 설립한 재단법인 서보미술문화재단 사무실을 옮겼고 지금까지 그곳에서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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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12월 64세의 나이에 심근경색으로 쓰러졌고, 2009년 11월 79세의 나이로 뇌경색으로 다시 쓰러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작업을 이어가서 2015년 소위 '단색화 열풍'이라고 부르는 상황을 맛보게 되면서 해외에까지 알려지게 되었고, 2019년 5월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89세의 나이로 생애 두 번째 회고전을 열게 되었다.같은 해 9월에 후진양성을 위해 기지재단을 설립하였다. 기지재단은 2023년 3월에 재단 명칭을 박서보재단으로 변경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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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0월14일 별세했다.향년 92. 유족과 지인들은 “작가가 투병하면서도 그림 작업을 지속하다가 몸 상태가 나빠져 지난 12일 서울 은평구 성모병원에 입원했으며 14일 오전 9시34분께 영면에 들었다”고 전했다. 앞서 그는 지난 2월 자신의 페이스북에 폐암 3기 진단 사실을 처음 밝히면서 “캔버스에 한 줄이라도 더 긋고 싶다”며 화업에 계속 몰두하겠다는 뜻을 전한 바 있다.


박서보는 '한국 단색화의 대부', '한국 아방가르드의 선구자'로 지칭되며, 1970년대 이후 한국 현대미술을 주도한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박서보류 스타일의 단색조 회화는 2010년대 이후 국내외 미술시장에서 상품으로 각광받으면서 화상들이 한국을 대표하는 현대미술사조로 부각시키기도 했다.

 

국내뿐 아니라 미국, 유럽, 중국, 일본 등 세계 각지에서 개인전을 열며 주목받은 그의 작품은 해외 저명 미술관들도 두루 소장하고 있다. 미국 뉴욕현대미술관(MoMA), 구겐하임미술관, 프랑스 파리 퐁피두센터시카고 아트인스티튜트, 일본 도쿄도 현대미술관, 홍콩 M+미술관 등에서 그의 작품을 품고 있다.박서보는 우리 예술 발전에 기여한 공로로 국민훈장 석류장(1984년)과 옥관문화훈장(1994), 은관문화훈장(2011), 대한민국 예술원상(2019), 금관문화훈장(2021) 등을 받았다.

 

 

그러나 1970년대 박정희 유신독재정권의 국가기록화 사업에 참여해 사실적인 기록화를 그렸고, 1980년 광주항쟁 당시 관변 예술단체 간부로 침묵하면서 80년대 내내 군사정권에 굴종한 이력은 큰 흠결로 남았다. 특히 올해 4~7월 열린 14회 광주비엔날레에서 자신의 이름을 딴 ‘박서보예술상’을 신설해 개막식에서 시상까지 했으나 지역 미술계와 청년 작가들이 동시대미술의 성격에 부합하지 않는 그의 작업 이력과 독재정권 부역 행위 등을 지적하며 거센 반대운동을 벌여 결국 1달여 만에 비엔날레 쪽이 상을 폐지하는 곡절을 겪기도 했다.

 

 

출생 1931년 11월 15일

고향 경북 예천군

나이 만 91세

학력사항
~2000.홍익대학교 미술학 명예박사 수료
~1955.홍익대학교 서양학과 학사 졸업


경력사항
2019.~기지재단 상임고문
2019.~기지재단 설립
2014.~서보 미술문화재단 상임고문
1994.~2014.서보 미술문화재단 이사장
1987.~제6회 대한민국미술대전 심사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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